영화를 보는 내내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얽혔다. 하나는 영화 내용을 보며 내가 느끼는 것들에 대한 파편적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서경식 선생님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지 추측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감상이 어려웠다. 누군가 내가 존경하는 분의 생각을, 영화를 통해 읽는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벽이 될 수밖에 없다.

붉고 건조한 대지 위의 말과 사람들

학창 시절 처음 갔던 뉴욕의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맨홀 뚜껑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 보던 익숙한 장면을 현실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시감 같은 것이다. 서경식 선생님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서 조지 벨로스의 〈이 클럽의 두 회원〉(1909)을 보고 미국 영화에 대한 비슷한 기시감을 느꼈다고 『나의 미국 인문 기행』(최재혁 옮김, 반비, 2024)에서 서술하고 있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땀과 피가 튀는 주름상자의 그림 속 세계에서….’ 영화 〈제로니모〉는 보는 내내 내 입에서 모래가 씹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붉은 먼지가 화면을 가득 뒤덮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로니모〉는 조금이라도 농담이나 유머가 허용되지 않는 고딕건축 양식을 닮은 서부영화이고, 전형적인 ‘미국 영화’이다. 영화는 늘어선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장대한 사막의 붉은 절벽을 배경으로, 일관된 붉은 먼지 속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 욕심에 찬 찬탈자들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땅을 포기 못 하는 이들의 대립 속에 몇 안 되는 소수의 선한 중재자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극 중에서 소수의 백인과, 통역을 맡은 소수의 원주민 군인이 그들이다. 그들의 역할은 절대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 밀려오는 끝없는 백인들에게 대항한 소수 원주민이 저항하는 끝을 우리는 이미 역사책을 통해 알고 있다.

서경식 선생님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펜과 칼』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입문서로서 소개하고 있다. “‘파멸을 향해 갈 운명임을 알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라며 이를 마치 시의 한 구절 같다고 표현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232쪽)
다른 것은 용서해도 땅에 대한 주장 앞에 가차 없는 처단을 하던 제로니모 역 배우 웨스 스투디의 극 중 대사는 영어를 서툴게 하는 원주민의 표현 방식을 들어 마치 짧은 시구와 닮았다.

“이렇게 넓은 땅에,
왜 아파치족을 위한 땅은 없는 거지?
왜 ‘하얀 눈’은 모든 땅을 원하는 거야?”

With all this land,
Why is there no room for the Apache?
Why does the ‘White Eye’ want all the land?

백인 중재자와 인디언 중재자

크룩 장군과 게이트우드, 데이비스, 시버 등은 극 중에서 백인 중재자이다. 이와 동시에 미 기마병대 속에는 스카우트 아파치 군인이 통역사이자 종족의 배반자로 나온다. 이들은 협상을 위해 같이 다녔으며, 제로니모와 함께 전쟁이 끝난 후 모두 유배를 가거나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평화를 추구하는 중재자들의 상징적 운명이다.

2023년 겨울 서경식 선생님의 일본 별장에 모여든 조문객들 사이에 있던 나는 선생님이 마지막 집필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의 맺음말 글을 받게 되었다. 그 글에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얀마,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서 전쟁과 학살, 난민이 고통받고 있는 반지성의 극치의 시대에 ‘선한 이들’을 응원하고 인문주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 앞에 용기 내 인간의 선한 중재자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그 글은 끝맺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에서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 페이지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261-262쪽)

이 영화는 비록 그들의 역할이 성공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선한 중재자들에 대한 서경식 선생님의 바람이 반영된 추천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정연두)

정연두는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사진, 영상 등의 미디어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시각예술과 퍼포먼스, 공연과 영화의 맥락을 넘나드는 복합 매체 작업으로 이질적인 문화 환경 속의 상황들을 접합하는 작품을 주로 만들어왔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인물들을 연결시키거나 다큐 멘터리와 픽션, 개인과 사회를 접속시키고, 시·음악·연극의 언어를 경유하면서 현실을 다시 바라보는 역설의 태도를 견지한다.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센트럴 세인트 마틴 칼리지 조소과 수료, 런던대학 골드 스미스 칼리지 미술 석사를 졸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