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FF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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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이종찬] 한국과 독일, 서로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디아스포라영화제 특별 기획 <서신 교환 프로젝트>

 

디아스포라영화제의 자문 위원인 서경식, 김인선, 이종찬, 정지은 선생님, 네 분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

한국, 일본과 독일 서로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네 분의 자문 위원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삶 속에서 경험하고 생각한 '디아스포라'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간 아카데미 프로그램 속에서 강의 형태로 나누던 관객과의 대화를 '서신 교환'이라는 색다른 방식을 통해 관객 분들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자문 위원 분들의 서신을 통하여 '디아스포라'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이종찬 선생님과 김인선 선생님께 서로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 함께 읽어보아요.​​ ​ ​​ 

 


 

 

독일의 김인선 선생님께 첫 번째 편지를 드립니다.

 

지금 저는 2019년 봄 디아스포라영화제 때 인천 아트플랫폼 한 건물의 옥상 파티 자리에서 보았던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떠올렸다’고 썼지만, 이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 보낼 공개서한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으로 선생님의 그때 모습이 소환되어 불려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영화제 프로그래머 이혁상 감독님은 일일 바텐더로 변신하여 참석자들에게 손수 제조한 칵테일을 나눠주셨고, 파티의 분위기를 돋우는 음악에 맞추어 사람들은 편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요. 그때 선생님은 현장의 공기에 맞추어 몸을 가볍게 흔들거리고 계셨는데, 덜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선생님의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또 자유로워 보였던지 마치 사진적 이미지로 제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

 

제가 김인선 선생님의 존재를 처음 인지하게 된 것은 아마도 2018년 혹은 2019년, 출판사 ‘나무연필’의 임윤희 대표님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얼마 전 출간된 선생님의 자서전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나무연필, 2021)의 기획 단계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요.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임 대표님이 제게 슬쩍 들려주셨지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직접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던 것입니다.

 

편지를 쓰기 전에 선생님의 따끈따끈한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는 ‘한 여자의 일생’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더군요.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972년 독일로 이주한 뒤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 그리고 한 여성을 만나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독일 내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호스피스 단체 ‘동행’을 설립하신 것 등 선생님의 생애사를 한 호흡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독일의 호스피스 교육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었다. 각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에 대한 입장과 관점을 정리해본 사람만이 죽음을 앞둔 이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교육이었다. 이는 먼지가 쌓여 있던 자기 인생의 서랍을 하나씩 꺼낸 뒤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듯한 과정이었다. 또한 즐거웠던 일, 힘들었던 일, 덮어두고 지나쳤던 일 등을 다시 짚어보고 직시하면서 자기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162쪽)

 

선생님의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은 명시적으로 2021년이지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의 모태는 선생님이 독일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던 당시에 이미 벌써 이루어졌겠구나,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호스피스가 되기 위해 교육 참가자들은 타인의 죽음을 대면하기 전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대목이 제게는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주, 퀴어, 노년’. 선생님의 책을 읽고 제가 수첩에 메모해둔 글귀입니다. 잠시 뒤 각 단어의 오른쪽 자리에 저는 또 이렇게 적어 보았습니다. ‘정주(定住), 이성애(異性愛), 젊음’. 맞습니다. 서로 상반된 가치들이지요. 이렇게 무심코 써놓고 보니 단행본의 제목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는 말의 의미가 더욱 분명히 읽히기 시작하더군요. 그 문장의 속뜻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그 자체로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주, 퀴어, 노년의 삶.

 

독일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하시던 중 “병마가 찾아와서 젊은 시절 악착같이 익혔던 독일어를 모두 잊어버린 채 모국어만을 기억해내는 이들”도 보셨다는 선생님의 경험은 특히나 지금의 저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고 가깝게 읽히는 구절이었습니다. 현재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저의 1938년생 어머니의 모습을 곧바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현재 강원도 춘천 본가에서 역시나 고령의 1946년생 아버지가 돌보고 계시고, 2남매인 저와 누나가 함께 틈틈이 챙기고 있는 중입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전희경은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력은 무엇보다 인간의 취약함을 사유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2020)

 

어머니가 치매를 앓게 된 후부터 저는 ‘인간의 취약함’이라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해당되는 보편적 조건일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 그러나 생활의 실감 측면에서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묻는다면 저는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로병사(老病死)’의 차원이 진지하게 고려되기보다는 그저 ‘생(生)’, 즉 살아 있음, 살아 있어야 함을 둘러싼 담론들이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한때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이른바 웰빙(well-being) 담론이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합니다. 마치 인간의 삶이 연년세세, 언제고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질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질병 중에서도 ‘치매’는 참으로 예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이 하필이면 기억을 잃어가는 병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기억을 잃는다는 건 어떤 감각일까요. 작년에 저는 이 질문을 아프게 절감한 적이 있습니다. 춘천 본가의 어머니를 살피고 다녀온 그 날 저녁, 저는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오늘 왔다 간 게 너니? 나는 네 외삼촌이 왔다 간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자꾸 네가 다녀갔다는구나. 아이구, 나 어떡하니.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보다.”

 

괜찮다고, 우리가 기억하면 된다고 어머니를 진정시켜 드리고 전화를 끊은 뒤 저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잘 알면서도 어머니의 현재 내면 풍경이 과연 어떠할지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려 애를 썼습니다만, 저로서는 도무지 가닿을 수가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철저한 암흑이었지요. 그날 밤 저는 오랫동안 잠자리를 뒤척였습니다.

 

어머니는 매번 통화 때마다 저에게 신세 한탄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너희들에게 짐이 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어머니 덕분에 저는 ‘독립’과 ‘의존’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녕 인간은 독립적인가, 독립적이어야 하는가?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 삶이란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저는 유년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떡볶이를 지금도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어머니는 고추장 대신 간장을 베이스로 한 떡볶이를 제게 내어주시곤 하셨는데, 그때의 영향인지 지금도 저는 매운 떡볶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있네요. 돌이켜보면 그 시절 어머니의 그 간장 떡볶이가 저에게 얼마나 큰 의존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에게 의존만 하고 있다고, 짐이 되고 있다고 푸념하시지만 동의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머지 가족들 역시도 아마 각자의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독립과 의존의 ‘경계’를 자명하게 나누곤 했던 인식은 이제 저에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질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안과 밖의 ‘경계’를 인간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되묻는 디아스포라영화제의 공개서한 프로젝트에서 선생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지요.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작년에 영화제 해외 자문 위원이신 김인선, 서경식 두 분 선생님의 모습을 뵐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올해 5월 예정된 영화제 때도 두 분이 영화제에 참석하시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비대면 온라인 프로그램 등의 방법으로라도 두 분을 만나 뵐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베를린의 코로나19 상황은 현재 어떠할런지요. 모쪼록 건강하세요.

 

2021년 3월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貞陵)에서

 

 

 

이종찬

독립연구기획자. 대학(원) 영문과에서 문예비평 및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비판적 문화연구 집단 ‘문화사회연구소’에서 활동했다. 디아스포라 문학과 예술의 사회적 존재론에 관심이 많다. 서울시 자치구 중 하나인 성북에 거주하며 그곳의 예술인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아카데미즘적 글쓰기와 신변잡기식 수필, 그 중간 정도의 글쓰기 양식이라 할 ‘비평적 에세이’의 문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 

 

 


 

 

 

한국의 이종찬 선생님께 첫 번째 답장을 드립니다.

 

지난번 선생님께 답장을 보내드렸는데 받아보셨는지요. 선생님을 2019년 영화제에서 만나 뵙고 인사드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렇게 서면으로라도 말씀 나눌 수 있어 반갑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월은 또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군요.

 

제가 22살에 한국을 떠나 72살이 되고 보니 이제는 살아갈 시간보다 죽음을 맞이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문틈으로 빠져나가는 바람 같다고 누군가 말해주더군요. 선생님이 읽으신 저의 책은 “한 여자의 일생”이라기보다 부분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제 삶의 경험을 적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저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아왔고, 또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리고 그 어려운 시간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오면 다시 또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당해야 하죠. 어려서부터 저를 무척 사랑하고 길러주셨던 외할머니가 해수병으로 고통스러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저는 세상이 끝나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병들고 늙어서 죽는 과정을 겪어야 하지요.

 

그렇게 저에게 호스피스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72년 독일로 와서 병원에서, 양로원에서 근무하며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 베를린에서 ‘이종 문화간의 호스피스’를 시작하기 전까지, 독일에는 독일인들을 위한 호스피스는 있었지만 외국인들을 위한 호스피스는 없었어요. 문화와 언어와 정서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독일이라는 타국에 와서 병이 들거나 삶을 마감해야 하는 경우 그들을 도와주고 동행해줄 단체가 없었지요. 그렇게 2005년에 저는 재가용 호스피스를 시작했고, 그 일은 제 삶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 독일에 와서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해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행운아지요. 비록 이혼을 하고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면서 주위의 한국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았고 당당했습니다.

 

그동안 삶의 많은 부분을 혼자서 살아오면서 깨달은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주고 존중해 주겠는가’였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님이 치매를 앓게 되시면서 가지시는 고민은 우리 모두가 경험해야 하는 현실이지요. 인간 두뇌의 발달로 달나라를 쉽게 다녀올 수 있는 현대인들조차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치매입니다. 예방이나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지도 못하고, 더욱이 치료 방법은 아직도 찾고 있지 못하는 현실이지요.

 

저의 어머니는 한국의 보편적인 어머니들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었어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한국에 나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저를 낳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셨습니다. UN에 근무하시던 계부의 통역사로 일을 하던 중 결혼을 하시고 세계를 다니셨지요. 그리고 스위스에서 계부가 돌아가시자 독일로 돌아와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가 사는 베를린에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늘 자신에게 충실했고 자신을 사랑했던 분이지요. 참으로 보기 드문 분이셨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한국의 어머니들이나, 자신의 삶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외면하는 삶도 완전한 삶은 아니겠지요. 어떠한 삶이든 본인이 결정하고 책임져야할 일이겠지요. 아무런 책임도 부담도 느끼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모두를 버리는 것도, 오직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결정이고 그 결정을 책임져야겠지요.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한 번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결정을 하든 그 책임도 내가 져야 합니다. 이제 저도 많이 산다면 10년 정도 더 살겠지요. 그동안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겠어요. 선생님도요.

 

김인선
스물 두 살의 나이로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되었고, 신학 공부도 시작했다. 그러다 꽃처럼 다가온 운명의 사랑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 후 독일 이종문화 간 호스피스 단체 '동행'을 설립하였고, 지금은 자신의 뜨겁고 유쾌한 삶의 이야기를 한국 청년 성소수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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